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진행 == 상황이 극단적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며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 연설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잠정 등재 목록으로 등재되었다.]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가 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났다. 벵골인의 불복종운동과 파키스탄군의 유혈진압으로 사태가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자 대응해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시를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났고, 그는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 [[파키스탄 자치령]] 시절부터 동파키스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총독(governor)이 있었고 이 자리는 파키스탄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자리였다. 민정 시기에 이 자리는 실권이 없었고 실권은 동파키스탄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보유하였으나, 1958년부터 파키스탄에서 군정이 시행되면서 총리직이 없어짐에 따라 총독이 실권까지 가졌고 파키스탄군 장성이 임명되기도 했다.]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하면서 "나는 벵골 땅을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녹색땅 방글라데시를 피로 물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군의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렸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아침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서 정식으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동, 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독립 선언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군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고 라흐만을 반역자로 선포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이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것인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닥치는대로 죽이고 강간하고 파괴하는 대살육극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와서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과 그의 체포는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쌓이고 쌓였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질렀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정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 대통령 대행: 사이예드 나즈룰 이슬람. * 국무총리: 타주딘 아흐메드. * 방글라데시 해방군 총참모장: M.A.G. 오스만니 대령.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과 동파키스탄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된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되자 놀란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고,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번졌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